Written in interview by Park Sang-gyu. Korean only. (2015 Daum crowdfunding series).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장난기 섞인 중저음은 의기양양했다. 목소리도 애써 밑으로 착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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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그거 알아? 나 8·15 광복절에 간다, 평양에! 초청장 왔다, 북한에서.”

한국어에 서툰 뉴질랜드 남자는 “하하하!” 크게 웃었다. 나는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기사 마감에 쫓겨 정신이 없었다. 부족한 영어 실력 탓에 이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기도 어려웠다.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귀찮은 마음을 전했다.

“로저, Do you know ‘뻥’? 뻥 치지마. I’m very busy!(나 지금 바빠!)”

그는 약올리듯 다시 “하하하!”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더니 바로 문자메시지로 사진 한 장을 보냈다. 북한에서 온 초청장이었다.

친애하는 선생. 조선-뉴질랜드친선협회는 이미 선생과 초보적인 협의를 진행한데 따라 조국해방 일흔돌이 되는 8월에 평양에서’백두대산줄기사진전시회’를 의의있게 조직하여, 백두산에서 뻗어내려 제주도 한라산까지 하나의 지맥으로 이어진 아름다운 조선의 산천풍경을 보여줌으로써 조선민족의 단일성과 통일염원을 널리 알리는 데 특색있게 기여할 수 있다고 보면서 선생을 8월 15일을 계기로 5~7일간 초청하는 영광을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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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사람이 평양에서 백두대간을 주제로 사진전을 연다니! 로저 셰퍼드(49)는 이렇게 사람을 종종 놀라게 한다. 한국인이 못하는 일을 해서 놀랍고, 우리의 상상력이 얼마나 협소한지를 깨닫게 해 충격적이다.

올해는 일제에게 해방된 지 70년이 되는 해다. 한반도는 해방 3년 만에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양쪽의 사람들은 자유롭게 서로의 땅을 오가지 못한다. 양쪽의 사람들은 이방인이 찍은 사진을 통해 남과 북의 산이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는 처지가 됐다.

로저 셰퍼드는 지리산 아래인 전남 구례군에 산다. 그의 거실에서는 지리산이 보인다. 지리산은 백두대간의 끝이고, 이 산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념갈등의 처절한 끝을 봤다. 북한에서 온 초청장을 받은 로저 셰퍼드는 지리산을 하염없이 보면서 끝이 안 보이는 고민을 시작했다.

‘평양에서 어떤 사진을 전시하지?’

‘몇 장의 사진을 어떻게 평양으로 운반하지?’

‘사진 인화와 운반 비용은 어떻게 마련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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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은 해답을 주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작업을 시작했다. 북한 사람들에게 남한 산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들고 산에 올랐다. 로저가 먼저 솔직하게 말했다.

“상규, 나 돈 필요해!”

“나 회사에 사표냈잖아. 백수가 무슨 돈이 있어. 근데, 돈은 왜?”

“평양 체류비는 북한에서 부담하겠대. 남한에서 사진을 인화해 북한으로 운반하는 게 문제야.”

“나 돈 없어!”

“누가 당신한테 달래? 이봐, ‘다음’ 뉴스펀딩으로 어떻게 안 될까? 남한 독자들의 힘으로 백두대간 모습을 북한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도 의미 있잖아.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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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펀딩 기획 ‘백두에서 지리까지, 나는 걸었다’를 시작한 배경에는 이런 사정도 있다. 로저의 고민은 계속 이어졌다. 그는 해방 70주년 사진전이니, 사진 70장을 전시하기로 했다. 남·북한 백두대간 사진 각각 35장씩 말이다.

“북한 사람들에게 남한의 산을 보여주는 좋은 자리잖아. 그들은 남한의 산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남한 사람들처럼 등산을 하지도 않고. 남북의 산은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잘 인화해서 액자로 만들어 가져가야지. 내게도 아주 뜻깊은 일이야!”

문제는 운송 방법이다. 항공기로 중국을 거쳐 평양으로 옮기면 비용이 만만치 않다. 그의 말대로 사진을 액자로 제작하면 부피가 클 수밖에 없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로저는 판문점을 관리하는 유엔군 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쪽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자문을 구했다. 그가 좋은 아이디어를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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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을 통해서 옮기는 건 어때? 사진만 옮긴다면 우리는 허락할 수 있어.”

중국을 거치지 않고 육로로 사진을 옮긴다! 로저의 흥분이 시작됐다. 하지만 그야말로 산 너머 산이다. 무려 네 개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1단계 : 남한 정부의 통일부가 허락해야 한다.

2단계 : 판문점을 관리하는 유엔군 사령부 군사정전 위원회도 승인해야 한다.

3단계 : 사진을 개성으로 옮겨 줄 개성공단 기업가를 찾아야 한다.

4단계 : 개성에서 사진을 받아가는 걸 북한 정부도 동의해야 한다.

로저는 일단 일을 시작했다. 순서대로 진행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혼자 힘으로 유엔군 사령부 군사정전 위원회에게 ‘충분히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젠, 사진을 옮겨 줄 개성공단 기업가를 찾아야 한다. 평양에서 우연히 만난 A기업가가 생각났다. 짧은 인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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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평양의 한 호텔 식당이었다. 로저는 조선-뉴질랜드친선협회에서 일하는 황승철과 함께 식사를 했다. 갑자기 남한 억양의 말투가 식당에서 들렸다. 모두의 눈길이 그에게 쏠렸다. 로저는 그에게 다가가 “남한에서 왔느냐”고 인사했다. 평양에서 외롭게 남한 말을 구사한 그는 개성공단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A씨였다.

A기업가를 생각해낸 로저는 명함을 찾기 시작했다. 평소 명함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자신을 자책하면서 말이다. 며칠 만에 어렵게 그의 명함을 찾았다. 로저는 지난 22일 서울 종로의 한 식당에서 A기업가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나 “북한으로 사진 좀 옮겨달라”는 부탁을 하자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로저는 말을 돌렸다.

“액자에 담은 사진 70장을 평양으로 보내야 하는데, 걱정입니다. 비용도 많이 들고.”

반전이 일어났다. 부탁도 하기 전에 A기업가가 일도 아니라는 듯 “제가 개성까지는 가져갈게요. 통일부만 허락한다면 크게 어려운 일 아니니까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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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생각대로 일이 풀려가다니. 로저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혼자 막걸리를 사서 청계천으로 갔다. 청계천을 보면서 뿌듯한 마음으로 막걸리 한 병을 비웠다. 들뜬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내게 전화해 “막걸리 한 잔 하자!”고 했다.

로저는 지금까지 여섯 차례 북한을 방문해 백두대간을 탐험했다. 남쪽의 산은 그보다 훨씬 많이 다녔다. 사진가이기도 한 로저는 사진집 ‘코리아 백두대간 남과 북의 산들’을 펴냈다.

2013년 9월, 로저는 이 사진집을 남한의 박근혜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게 각각 선물했다. 김정은 위원장에게는 북한의 공무원을 통해 전달했고,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우편으로 보냈다. 양쪽에게서 모두 “한반도의 산을 아름답게 기록해줘서 고맙다”는 취지의 답변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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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일도 잘 될 것 같아. 북한 정부에 지금 상황을 설명하면, 사진을 개성에서 평양으로 옮겨 줄 거야. 2, 3, 4단계를 내 힘으로 넘으면, 남한의 통일부도 긍정적인 답변을 주지 않겠어?”

기분이 좋아져서인지, 아니면 막걸리 탓인지 로저의 표정은 무척 상기돼 있었다. 통일부는 과연 그에게 어떤 답변을 줄까? 그에게 행운을 빈다고 말했다. 그가 높은 톤의 목소리로 말했다. 

“여력이 되면 독도 사진도 찍어서 평양으로 가져가고 싶어. 북한 주민도 독도를 보고싶어하지 않겠어? 북한 사람들이 내 사진을 보고 ‘남북의 산은 다르지 않구나’ ‘남쪽의 산과 자연도 참 아름답구나’하고 느끼면 좋겠어. 그들이 내게 그렇게 말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그렇게 되면, 나 울지도 몰라!”

이 말을 들으니,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듯했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로저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로저, 당신 말을 들으니 내가 울 것 같아!”

철옹산 1093m 맹산군 평안남도 ⓒ로저 셰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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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사에 포함된 사진은 북한 쪽 백두대간 모습입니다. 오는 8월 15일 평양에서 전시되는 사진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로저 셰퍼드가 독자 여러분들을 위해 몇 장을 일부 공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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